끼니마다 고기가 없으면 밥상에 밥이 빠진 걸로 여기는 이들과 크리스마스 3박4일을 보냈습니다.
근데 참 훈훈했습니다. 왜냐구요?
그분들이 저를 위해서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고기를 한 점도 상 위에 올리지 않았거든요. 



생야채도 생과일도 못 드시는 우리 시엄니.
전쟁 중에 태어나 어릴 때 생과일, 생야채라고는 구경도 못 해보셨답니다.
시에서 배급되어 나오는건 감자와 고깃덩어리.
생야채, 생과일을 드시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목구멍에서 넘길 수가 없다세요.

어머님 올라오시면 돼지갈비구이해서 대접하고 그랬는데,
제가 6개월 전부터 고기를 상 위에 올리지 않는 '배씬(!)'을 때리는 바람에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이와 고기만 빼면 뭐든지 먹는 이와 3박4일의 동거가 이뤄졌지요.

'어머님이 주시는대로 먹으리라'는 마음으로 시댁에 내려갔는데
너무나 고마우시게도 크리스마스에 그 흔한 거위간 요리 하나 내지 않으셨네요.
해물은 먹는다고 거의 다 해물로 준비하셨어요.
크리스마스 당일 한 번 닭요리 나왔습니다.
한 달에 두 번 먹다가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먹는 닭이려니...

다섯 가지 흔한 야채로 거의 모든 요리를 다 하시는 어머님의 부엌은 제 부엌보다 정리가 훨씬 잘 되어있었습니다. ㅠㅠ
다양한 곡류도, 다양한 야채도 없었고, 유기농도 아니었을 뿐더러,

밥상을 오르내리는 그 해물 중에는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해조류 하나 없었고,

해물이래도 내리 두 끼씩 사흘을 먹으려니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지만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이가 고기만 빼고 다 먹는 이를 위해 고기를 빼고 차려준 밥상은 그 어느 밥상보다 감동적이고 뭉클한데가 있었어요.

고기를 먹는 이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에게 하는 배려에 참으로 감사했어요.

게다가 10개월짜리 아기의 이유식을 위해서 제가 적은 목록대로 아버님이 유기농으로 장을 봐주셨어요. 

그 목록 안에 고기는 커녕 닭살도 없었는데도 고기가 없으면 식사가 안되는 어머님도 아버님도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


해물이라도 안 먹었으면 어머님이 얼마나 황당해하셨을까..

시댁에 내려가 내가 어머님 부엌을 휘저으며 내게 맞는 요리를 하는 무례함을 범할 수도 없고.


6개월 전, 고기를 끊기 전에 우유를 끊기 시작했을 때,
어머님께서는 제가 어디서 이상한 정보에 홀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셨더랬어요.
근데 이젠 어머님보다 제가 훨씬 더 다양한 식품을 먹고 있으며,
굉장히 많은 영양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걸 아시기 때문에 걱정 안 하십니다.


사실 제가 안 먹는 건 고기밖에 없지만, 어머님이 안 먹는건 수 십 가지에요. 

생야채로 만드는 샐러드와 생과일도 안 드시고, 요리에 쓰는 야채는 고작 5가지 될까?

곡류라고 드시는 건 한 달에 한 번 드실까 말까하는 쌀과 가끔 드시는 렌즈콩이 전부.


아, 참, 크리스마스에 저를 위해서 쌀 씻어 밥도 해주셨어요. ㅎㅎ

물론 씻어서 물 앉히고 냄비밥하는건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밥을 할 때, 쌀을 씻어 물을 흥건히 붓고 소금도 조금 치고,

밥이 다 되면 남은 물을 버리거든요. 세상에, 그 영양덩어리를~!!!

'쌀나라'에서 온 저한테 배워서 어머님이 이젠 밥물을 버리지 않으시지요.


하긴 이 동네는 '고기밖에 없다'고 해도 그 고기의 종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돼지고기, 소고기 뿐만 아니라 토끼고기, 양고기, 송아지고기, 말고기를 연중 구할 수 있고,

연말에는 멧돼지고기, 캥거루고기, 사슴고기까지 시장에 나오거든요.

조류도 닭고기 뿐만 아니라 비둘기고기 (전깃줄에 앉아있는 비둘기를 먹는건 아님), 꿩고기, 칠면조고기, 매추라기, 오리고기, 거위고기 등을 시장에서 늘상 쉽게 구할 수가 있어요.


때문에 프랑스에서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는건 돼지고기, 소고기만 안 먹는게 아니라

(닭은 한 달에 두 번 먹다가 이제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어요.. ^^;)

위에 나열한 15가지 동물을 먹지 않겠다는 선언인거에요.


게다가 소고기, 돼지고기는 살만 파는게 아니라 코, 혀, 귀는 물론 -간, 꼬리 등등 이것들은 한국에서도 팔지요?,

소의 뇌까지 버젓이 시장에 나옵니다. 송아지의 뇌까지도요.

육식하던 때도 소 혀와 소 뇌, 이것들 만큼은 못 먹어주겠더라구요. 으~~

돼지고기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고기로

유럽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돼지고기의 가공품이 소시지, 수시쏭, 쟝봉, 테린 등 수 십 가지가 됩니다. 


제가 육식하던 때는 한번 썰어먹어본 쟝봉 맛에 꺼뻑~ 넘어가고, 

날 소고기를 투명할 정도로 얇게 썰어서 내오는 카파치오,

날 소고기를 곱게 다져 날 계란 올려 양념과 함께 나오는 스테이크 타르타르에 감탄을 하며 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카파치오와 스테이크 타르타르, 제가 군침을 삼키던 메뉴였는데...

유럽인인 저희 남편도 '날고기를 어찌 그렇게 잘 먹을 수 있냐'며 못 먹는 메뉴에요.

'안 먹어보던걸 그렇게 잘 먹는 너처럼 식성좋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어머님께서 놀라셨더랬어요. ㅋㅋ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먹고 싶다는 옛정(?)이 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일지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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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