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s 쉼2012.01.11 08:31

이 글은 2005년 7월 22일, 네이버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처음 올렸던 글입니다. 포스팅하자마자 비공개 스크랩이 쇄도해서 확 닫아놨어요. 그때만해도 블로그에 처음 글을 썼던 때여서.. 6년간 비공개로 해놨던 글을 코닥이 파산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끄집어 다시 읽어봅니다. 


'100년 역사의 코닥'이라함은 'photography'라는 단어가 생겨나던 때부터 사진의 역사와 늘 함께 해왔다는 의미다. 세계 최초의 사진은 1827년 경, 니세포르 니엡스의 정물사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이란 작품은 노출이 장장 8시간!!! 지금이야 왠만한 후진 카메라도 1/500은 기본이지만 180년 전 초기 사진은 은근과 끈기가 필요해야 했다.

 

초상사진 한 장 찍기 위해 부동자세로 30분씩 있어야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데 화가 앞에서 3박4일은 앉아있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똥빠지게 시간들여 찍어놓으면 더이상 재인화도 할 수 없었다. 사진이미지가 찍힌 감광판 자체를 인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사진기는 크고 무거웠고, 인화하는데 필요한 기계 또한 트럭 하나 정도 되었으며, 감광도는 매우 낮았다. 

 

<르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을 사진의 역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이유는? 복제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술만해도 은판사진의 복제는 사실 불가능했다. 왜? 원판 자체가 거울면처럼 번쩍이고 상이 너무 어렴풋하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복제가능하게 했던 기술자가 바로 코닥연구원이었다.

 

"역광을 비추거나 흰 마분지로 반사광을 비추어 명암대비를 강하게 하면, 그 상이 뚜렷이 보이지만 복제상태로 이 상을 선명히 보여주기는 무척 어렵다. 원판 자체가 거울면처럼 번쩍이고 상은 너무 어렴풋하기 때문이다. 이 상을 복제한다는 난제를 훌륭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코닥 연구소의 와트씨의 덕분이다"

- 1952년 5월 <포토그래픽 저널>에 실린 헬무트 거른샤임과 알리슨 거른샤임씨의 말 인용.

 

무겁고 큰 장비로 대중화가 힘들었던 사진기가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정도로 간편해지도록 나오자 -쉽게 말해서-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은판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고, 인화트럭을 갖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얇은 막에 몇 초만에 영상이 기록되는 기술의 힘에 의해 '탐정카메라' (말하자면 몰래카메라)라고 불리는 핸드카메라가 19세기 말에 대량생산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될만한 핸드카메라는 조지 이스트먼이란 제작자가 내놓은 '코닥카메라'였다.  아래 사진 속에 보이는 이가 조지 이스트먼.  

 

<S.S.갈리아 갑판에서 코닥카메라를 들고 있는 조지 이스트만>

프레드릭 파고 처치, 1890.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 소재, 로체스터, 뉴욕.

 

'코닥'이란 이름을 붙인 이스트먼의 작명술을 들어보자.

"순전히 임의로 글짜를 짜맞춰 지은 것입니다. 어떤 기존 낱말 전체나 일부를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상표 이름의 제 조건을 고루 갖출 수 있는 단어를 상당히 궁리한 끝에 그렇게 정했습니다. 짧은 단어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선적인 원칙이었습니다. 잘못 표기하여 그러 정체를 오도하게 될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신하고 특출한 개성도 있어야 했고, 외국의 다양한 등록상표법에도 맞아야 했습니다"

- 조지 이스트만이 존 맨리에게 보낸 보낸 1906년 12월 15일자 편지.

C.W.Ackerman, Geroge Eastman (Boston : Houghton Mifflinm 1930), p.76.

 

실제로 Kodak이란 상호는 전세계 어느 언어권의 사람이 읽어도 똑같이 '코닥'이라고 발음할 수 있도록 알파벳을 선택했다. 한국사람도, 프랑스사람도, 러시아사람도, 일본사람도, 미국사람도, 아프리카사람도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도 Kodak을 한결같이 똑같이 발음한다. '코닥'!

 

코닥이 히트를 쳤던건 세계적인 전략으로 내놓은 잘만든 이름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놓은 서비스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슬로건이 있다.

 

" 여러분은 단추만 눌러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해드립니다"

 

코닥카메라에는 필름이 장착되어 있었고, 판매가에는 현상 인화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을 찾아가는 손님에게 새로운 필름을 넣어 돌려주었다. 사진 한 장 찍고 현상소로 들고 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코닥카메라는 불티나게 팔렸다. 사진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코닥은 세계 제일의 사진관계용품 제조회사로 우뚝 선다. 내가 경험한 바로 특히 필름과 인화지만큼은 기타 어느 상표보다도 월등하다. 다른 상표보다 조금 비싸다. 하지만 비싼만큼 품질이 훌륭하다. 입자 하나하나 정교하게 퍼지고, 어느 색감 하나로 쏠리지 않으며, 눈으로 보는 그대로의 색을 -물론 자연광에서- 뽑아내는 탓에 우리 아버지는 필름을 사러 가시면 꼭 '코닥'을 고집하셨다.

 

"코닥 필름 하나 주세요!"

 

여튼 비싸긴 비싼 탓에 인화지는 만만한 상표쓰고, 필름만 -특히 흑백만큼은 꼭 코닥을 쓴다. 나중에 내 사진 산다는 훌륭한 고객 만나면 코닥인화지에 뽑아주면 된다. 그건 그렇고 여튼 우리 시대에는 대부분이 디카를 쓴다. 찍은 자리에서 확인하고 맘에 안 들면 수십번씩 다시 찍어도 필름값이 안든다. 필름 10롤씩 들고 다니느니 용량 빵빵한 메모리카드 한 장 카메라에 박아넣어 오면 된다. 기술은 발전은 빠르고도 놀라와서 200만 화소짜리 디카에 감격하던 때는 옛날 얘기고 이제는 7백만 화소 디카가 눈앞에 와있다. 디지탈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인터넷 전송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은 현상소는 장사하기 싫다고 봐야한다. 현상소에 가서 메모리카드, USB, CD를 보여주면 주문대에서 나와 옆에 놓여있는 사람크기만한 기계 앞으로 안내해준다. 알아서 출력해가세요,라는거다. 꼭 "코닥필름 주세요" 하셨던 아버지도 환갑이 넘은 지금, 7백만 화소짜리 디카 하나 들고, 메모리카드 1장 껴서 출사를 나가신다. 인터넷으로 사진도 전송하시고, 인화도 주문하신다. 인화된 사진은 우편으로 날아온다. 현상소에 굳이 발걸음할 필요조차 없다. 솔직히 말하면 위에 실은 코닥 상표도, 이스트만의 사진도 5분 전에 디카로 찍어서 포토샵에서 색보정해서 올린거다.

 

아마추어 사진가와 네티즌만 디카를 애용하는게 아니라 요즘은 프로페셔널 사진가들도 다 디카를 쓴다. 포트폴리오를 옆구리에 끼고 오는 프로페셔널은 별로 없다. 빈손으로 나타나서 주머니에서 CD 한 장 꺼내 에이전시 사무실 책상에 놓고 간다. 흑백사진 인화를 위해 암실에서 땀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난 20세기의 유물이 되어가는 듯 하다. 컴퓨터에서 흑백조절하고 곧바로 출력한다. 칼라로 찍었더라도 흑백으로 전환시키는 건 한 순간이다. 찍고, 현상하고, 인화해서, 골라낸 후 이튿날 보도하기엔 너무 늦다. 찍고, 확인하고, 전송해서, 30분 내로 보도화 되어야 한다. 이제는 필름조차 필요가 없어졌고, 인화지는 사진출력용지로 대체되고 있다. 암실이 사라지고 있다.

 

어제 신문에서 코닥이 2만5천명을 해고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작년 1월에 기업재조정을 발표했을 당시 수치의 1/3에 해당한다고 한다. 디지탈사진의 영향으로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탓이었던게다. 또한 지난 1년반동안 기술의 발전 속도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탓이었을게다. 어디 코닥뿐이랴? 작년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일포드가 인화지 제조를 중단했고, 코니카 필름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시대의 변화는 따라가야하고 받아들여야겠지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보니 마음이 아플 때가 종종 있다. 코닥의 기업재조정 기사를 읽는 지금이 그렇다. 누군가의 부고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매우 아프다. 일자리를 디지탈에 내주고 퇴사하는 2만5천명과 그 식솔들은 또한 어떠할 것인가.

 

오늘 아침 TV에서 코닥 광고를 보았다. 집에서도 디지탈사진을 뽑을 수 있는 코닥 디지탈사진 출력기! 지금까지 찍사들의 입장에서 최고의 서비스와 품질로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해왔던 것처럼, 앞으로 사진이 살아있는 한 코닥이 늘 함께 하기를 손꼽아 빈다. 내게 있어 '사진'이란 단어와 동급의 상징을 지녀왔던 코닥이여, 코닥이여, 영원하라!

 (2005년 7월 22일) 




Posted by 에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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