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그리스가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던 바로 그날, 비행기가 과연 뜰까 안 뜰까? 왜 하필 그날 파업을 하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4시간 전까지도 취소되지 않았다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갔다. 하지만 이륙선 전광판에 크레타행 노선이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선 당일 아침 6시에 파업 결의 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공항에서 샌드위치으로 피크닉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왔다. 48시간동안 하는 이 파업은 다음 날 저녁 8시에 끝나기 때문에 비행기는 밤 10시에 뜰꺼란다. 밤 10시발, 새벽 3시 도착이면 아이들 수면리듬이 모조리 깨질텐데.. 호텔과 비행기를 다 취소하나 고민을 하던 끝에 딸에게 물었다. "가고싶냐?" <슈렉>의 장화신은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가고싶다'한다. 그래, 가자! 까짓거! (그랬던 이 년이 크레타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에도 '집에 가자'고 성화를!!!)

에라클리옹(Heraklion, Iraklio; 한국에선 '이라클리오'이라고 하던데,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지명은 제 편의상 불어발음으로 표기합니다. ^^;;;) 공항에서 렌트한 차에 파리에서 크레트 지도를 다운로드한 네비양을 설치했으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곳으로 우리는 인도하는 네비양 덕분에 꼭두새벽에 한참을 헤매다 호텔에 당도하니 새벽 4시. 테라스가 딸린 호텔방이 널찍하기도 하지, 바닥은 또 마룻바닥이네! 아무리 좋으면 뭐하남? 전날 밤 호텔비는 날아갔고, 고작 3시간 자고 나오려니 돈이 아까워~ 꺼이꺼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 바다 위로 태양은 떠오르고!




설친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얼르고 깨우고 먹이곤 호텔을 나와 근처에 있는 시장과 아지오스 미나스 사원을 들렀다. 강한 햇빛을 받아 새빨갈꺼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토마토는 오히려 옅은 색을 띄고, 호박은 꽃이 붙은 채로 시장에 나오더군! (사진 업뎃만으로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각 지명마다 상세설명은 과감하게 생략합니다.)












* 아지오스 미나스 사원







에라클리옹의 고고학 박물관은 명성에 비해 아주 자그마한데 그림, 장신구, 조각 등 그 콜렉션의 놀라움은 도끼를 든 골리앗이었다!









고고학 박물관 앞에서 나른한 한 때 (잠결에 이렇게 몰카에 걸릴 수도 있으니 주의요망)



36시간의 여행일정을 놓친 상황에서 우리는 첫날 예정 경로였던 에라클리옹 시내 구경을 과감히 포기하고, 스케줄대로 크놋소스(Knossos)로 향했다. 이리하여 베네젤루 광장의 모리시니 분수는 구경도 못하고 크놋소스로 고고씽~

* 크놋소스 궁터 (기원 전 1700~1450년)










* 자로스 (Zaros)

크놋소스를 나와 크레타 남부로 내려가기 위해 남북을 횡단하다 자로스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예약한 숙소에 들어갔을 때, 한 할머니가 벽난로 앞에서 호두를 까면서 긴 테이블 반대편에 있는 노인과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그리고 난 이 곳에서 평생 잊지못할 매우 특이한 순간과 맞닥뜨렸다.


벽난로 옆에서 호두를 까는 주인 할머니.


그러고보면 크레타는 전혀 춥지 않았는데 왜 한겨울처럼 벽난로에 불을 붙이셨을까? 거실을 훈훈하게 덮히시려고 했던걸까? 애들과 가방을 한짐 지고 들어가 'Hello~'하자 그녀는 마치 먼 길 갔다가 돌아온 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간단한 그리스 인삿말 몇 개 밖에 모르는 내가 느낌과 추리를 동원한 자의적 해석에 의한 우리의 대화.


할머니 : "오~~~~~! 너 왔구나! 이라클리온에서부터 운전하고 온게야?"

나 : " 네 "

할머니 : "피곤하겠구나. 앉아서 뭐 좀 먹으렴. 차를 마실래? 커피를 마실래?"

나 : (양손에 든 짐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당황하며) "먹으려고 온게 아니라 방을 예약했는데......"

할머니 : "힘들텐데 앉아서 뭐부터 먹으렴. 급할꺼 없잖니. 커피 줄까? 차 줄까?"

나 : "그럼 차 주세요." (속으로 : 이거 charge(부가요금)으로 붙는거 아닐까? 상술이래도 할 수 없지모. 일단 앉아서 마시자.)



수저가 놓여있는 접시엔 꿀에 절인 건포도가 나왔는데 정말 맛있었다!

여기다가 까고 계시던 호두를 한 줌 주셨으니, 호두와 건포도와 꿀, 환상의 콤비!!!


난 이 할머니에게 묘한 친밀감을 받았다. 그녀가 아이들을 위한 쥬스를 갖고 나왔을 때, 나를 가리키면서 내 이름을 알려줬다. '당신은?'했더니 '카테리나'란다.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도 물어봤다. 막내의 이름에 "아~~!!" 하시더니 자기 가족사를 꺼내신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식구가 있나보다. 자기 가족 중에 카테리나가 셋이나 있다는 얘기도 하시면서, 물론 이걸 눈치로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여러 번 반복하셨으니까. 



카레리나의 파푸스(그리스어로 '아빠'를 뜻하는 것 같다)



그리스어밖에 못하는 카테리나와 그리스어를 못하는 나의 무력한 소통이 벽난로처럼 훈훈하게 오가고나서 카테리나는 호두를 까던 쟁반에서 남은 호두조각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뻔히 보이는 호두 조각을 카테리나가 호두껍질과 함께 걷어내고 있었다. '카테리나가 눈이 잘 안 보이는구나' 난 쟁반 가까이 다가가 호두 껍질과 섞인 호두 조각을 빠른 손놀림으로 걸러내기 시작했다. 뒤통수에서 남편이 "애들을 돌봐줘야지" 했으나 대꾸도 안했다. 애아범이 있는데 왜 굳이 엄마가 애를 돌봐야되는거냐 말이다. 조그만 호두 조각들이 점점 모여들자 카테리나가 깔깔대며 웃었다. 호두 발리기가 다 끝나고 카테리나가 그리스어로 '고맙다'고 말했다. '뭘요'라는 그리스어를 몰라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스어로 '고맙다'(에프샤리스토)와 '뭘요'(에프카리스토)는 한끝차이라는걸 나중에 알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식구들은 나만 놔두고 사라졌다.


"얘들아~ 어딨니?" 큰애 이름도 부르고, 작은애 이름도 부르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큰애의 대답이 저 편 복도에서 들린다. 방을 찾아 들어오니 가지런한 방에 호텔방같지 않은 알록달록한 이불이 깔린 것도 정겹고, 테라스로 보이는 산골마을 정경도 아늑하다.







한국처럼 산으로 둘러쌓인 곳에서 산골 정경을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마치 고향같다. 짐을 풀고 있는데 카테리나가 먹을꺼리를 '또' 올려보냈다!



몽글몽글 진 이 것은 불어로 lait caillé(레 까이예)라고 하는데, 우유를 발효한 음식이다. 난 락토즈 때문에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해 우유를 마시면 하루 종일 방귀가 나오는데, 크레타섬에서 먹은 우유나 발효우유는 어찌된 영문인지 속이 편했다. 이 섬에서 소를 본 적이 없는 걸 봐서 소젖이 아니라 염소젖으로 만든게 아닌가 싶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으니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드라. 로컬푸드유기농, 거기다가 vegera라고 써있는걸 봐서 채식식당이라는 얘기 같은데! 이건 완전히 나를 위한 식당이잖아! 띵호와~ 야호! 야호!





식당 아주머니가 우리를 테이블에 앉히더니 메뉴판도 주지않고 음식을 하나 하나 내오시더라. 채식요리를 주문하고 싶었는데, 메뉴판이 없으니 그저 주는대로 이름도 모른 채 먹는 수 밖에. (이름을 봤다해도 기억이 다 안 나지..) 그리스 음식들 하나같이 정말 맛있더라! 상에 내온걸 다 먹지 못하겠어서 저 위 사진 중 토마토 접시는 식당에 돌려줄 생각으로 아예 손도 안 대고 있었다. 그 안에 프랑스 요리 tomate farci처럼 고기가 들어있을꺼라고 여겨서, 그 요리를 느끼해서 싫어하는 나는 먹을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식당에서 먹어보니 고기가 아닌 밥이 들어있더군! 어쨌거나 부픈 배를 튕기고 있을 무렵, 디저트라고 또 내오신다! 맛을 보니 맛있어서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숟가락 댄 것은 남김없이 싹싹! 냠냠..



어른 2명, 아이 2명이 상이 휘어지도록 먹고도 남은 식사값으로 30유로 냈다. 프랑스같으면 어림없지! 50유로는 내야했을 터. 이렇게 산골마을 자로스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크레타 섬에서 기원 전으로의 여행은 둘째날 여행기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글과 사진이 맘에 드시면 가시기 전에 추천 좀.. ^^;

글 쓰는데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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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