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개월동안 아이가 40cm 자랐다. 아홉 달 품고 배를 갈라 낳은 내 자식이건만 난 아직도 '얘가 정말 내 자식 맞아?' 싶을만큼 신기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가 만나서 깜빡이던 불빛이 저렇게 쑥쑥 커서 웃고 애교 떨고 말하고 움직이고 성장하는 걸 보면 봐도 봐도, 암만 봐도 참 신기하다. 신생아 때 얼굴이 가끔 표정에 스칠 때, 팔 다리 목 하나 가누지 못하던 것이 뛰고 말하고 말을 알아들을 때, 정말 신기하다. 내 배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아이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저 곳에서 온 존재 같다.

 

한국에 있을 때, 내 생일에 받았던 선물이 하나 있다. 인형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직접 만들어준 보라색 곰인형인데, 이 녀석을 아이에게 갖고 놀라고 줬다. 그리고 곧 아이의 가장 아끼는 인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행방불명되버린 여행가방과 함께 녀석은 사라져버렸다. 4월 3일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이는 아직도 그 곰을 잊지 않고 있다. 말이라고는 몇 마디 못하지만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할 뿐 생각하고 기억하고 알아듣는 능력은 내가 알아듣는 아이의 언어능력 이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말이지 암만 봐도 신기하다. 가끔 '파~'를 찾으며 울며 잠든 적이 몇 번 있었다. 이제 더이상 '파~'를 찾지 않길래 '머리 속에서 사라졌나보다' 했는데, 난 오늘 다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새로 생긴 동화책에 '엘메'라 불리는 코끼리가 있는데,  오색빛깔 알록달록하다. 오늘 아이가 엘메의 몸덩이 중에서 보라색들만 짚어내는거다. '보라'라고 읽어줬다. '보라'..'보라'..'보라' 처음엔 아이가 보라색을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다. 실은 한 달 전부터 다시 못보고 있는 그 곰인형의 이름이 바로 '보라보라'다. 아이는 '보라보라' 발음이 안되서 '파~'하고 한 마디로 부르곤 했었다. 울며불며 '파~'를 찾아도 세상에서 돈으로 어디가서 살 수 없는 보라보라를 되돌려낼 수 없어 발만 동동거리며 같이 슬퍼하는 엄마를 더이상 보기가 딱했던걸까? 아이는 오늘 그렇게 내 입을 통해서 보고싶은 곰인형의 이름을 다시 듣고 싶었나보다.

 

행방불명된 짐 속에 아이의 동요 CD가 다 들어있었다. 현지에서 하는 수 없이 동요 CD를 하나 샀다. 나도 남편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된 동요. ㅠㅠ 그걸 한 일주일 정도 듣고 프랑스로 돌아온 후로 그 CD를 잊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어제, '이거나 한번 들을까?' 싶어 틀었더니 왠걸? 아이 눈빛이 빛나면서 신난다고 웃는거다. 입으로 말은 못해도 '나 이거 알아. 오랜만이네!' 싶은 표정. 그 CD를 들으며 아이는 잠이 들었다.

 

아이를 키워보니 여자가 왜 남자보다 말수가 많은지, 아이가 어릴 때 왜 말을 못하게 만들었는지, 왜 다섯 살 쯤 되서 이빨이 빠지고 영구치가 돋는지, 조물주의 뜻을 알겠다.

 

아이가 요즘 하는 말 중에 나를 단번에 무방비로 만들어 버리는 최강의 무기가 있다 : "엄마/아빠 상해~(사랑해)"

블로그 이미지

에꼴로

친환경, 유기농에 대한 글을 우리말과 불어로 기고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자들을 도와 한불 번역작업도 합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연재 '전환을 향해서'), 녹색평론, 녹색전환연구소, 귀농통문, KBS Green, 지오리포트, 네이버 파워블로거(2008~2009). 기고, 통번역, 코디 등 연락을 원하시는 분은 방명록에 남겨주세요.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