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씀

분류없음 2018.03.07 07:15

블로그 쥔이 출타 중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요즘은 글이 뜸하지요? 사실 지난 1년 반동안 개인적으로 무척 바쁜 일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프랑스 매체에 친환경/유기농에 대해 글을 기고해왔는데 그 원고료가 한국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흐미~ 언젠가 좋은 기회가 닿으면 흥미있는 주제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의 팬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쪽지나 덧글 남겨주세요. 여러분도 자기개발에 많은 시간 보내시고 건강하시고 늘 행복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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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꼴로

친환경, 유기농에 대한 글을 우리말과 불어로 기고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자들을 도와 한불 번역작업도 합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연재 '전환을 향해서'), 녹색평론, 녹색전환연구소, 귀농통문, KBS Green, 지오리포트, 네이버 파워블로거(2008~2009). 기고, 통번역, 코디 등 연락을 원하시는 분은 방명록에 남겨주세요.

우리 동네에 내가 알기로 나를 포함 한국인 3명이 사는데, 어제 하루만에 내가 아는 그들이 아닌 다른 두 명의 우리말 사용자를 만났다. 한 명은 우리 아파트에 공사하러 온 인부인데, 서울에서 12년 살았다고 한다. 한국어를 한국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을 한국에서 만나도 신기한데, 한국 밖에서 만나서 더 신기하다. 헤어지면서 « 수고하세요~ »하니 « 네에~ »하는 자연스러움에 그저 감탄 !

다른 사람은 지나면서 눈팅 몇 번 했던 이웃인데, 한국인 일 수도, 다른 동양인일 수도, 한국에서 어릴 때 입양된 프랑스인일 수도 있어서 서로 지나쳤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뭐하게 ? 나도 그런 쓰잘데 없는 호기심성 질문을 하도 많이 받아서 지겹다.) 그러던 어제, 두발자전거를 안 타려고 버티는 아들래미에게 작심을 하고 자전거를 가르쳐주리라하고 아파트 단지 마당에 내려와있었다. 자전거가 싫다고 버티던 녀석이 두발자전거로 달리는데 성공을 하고 나니 주차장을 한 50바퀴는 돌았을까 여튼 40분째 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내가 애들한테 하는 한국말을 알아듣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기랑 내려와있던 동양인 얼굴의 이웃이 말을 붙여왔다. « 한국인이세요 ? »

나만큼이나 프랑스 생활을 오래 했던 한국인이었는데, 18개월 된 아기에게 계속 불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데로 아기가 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아기가 하늘을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하길래 내가 ‘비행기 ?’하는데 아이 엄마는 동시에 ‘아비용 ?’이라고 말했다. 불어로 '아비용'은 비행기를 뜻한다. 아이에게 ‘쎄쎄쎄~’를 해주면서 ‘얘 이거 할 줄 알아요 ?’하니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저기 딴전팔고 있는 새 아기가 내 손가락을 잡아 올리더니 ‘쎄쎄쎄~’를 하는게 아닌가 ?!

다음에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아기 엄마를 뒤로하고 들어와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첫번째, 그 엄마는 다른 아이도 아닌 바로 자신의 아기에게, 아직 말도 안 뗀 아기에게 왜 한국인 억양이 섞인 외국어로 말을 가르쳐주면서 동시에 한국을 그리워하는 걸까 ?

나도 가끔 울컥 한국이 그립고, 한국 음식이 땡기고, 한국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찰진 우리말로 얘기하고 싶을 때가 불현듯 쯔나미처럼 밀려들 때가 있지만 내년 1월이면 프랑스 생활 18년차가 되가는 판에 내가 나를 달래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향수병이 돋으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페북에 쏟아놓기. ㅎㅎ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이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어떻게 표현하는 지가 내 관심을 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생각과 행동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를 본다. 어떤 언어로 ‘말’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한국어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정서가 있기는 하다. 그건 동의하는데, 그 공유하는 정서가 반드시 커다란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건 마치 나도 사랑을 하고 싶고, 너도 사랑을 하고 싶지만 내가 너와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 사는 한국인, 여기에서 살다가 떠난 한국인, 여기 놀러왔던 혹은 일하러 왔던 한국인들과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면서 이제는 단지 ‘한국인’이라는 공집합이 내게서 유대관계를 이끌어내는 주된 요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솔직히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모두와 친구관계를 맺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말로 대화한다고 해서 서로 '말'이 다 통하는 건 아니지 않나? 동일한 모국어로 얘기하고 있어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우리말 할 때 한국이든 외국이든, 외국에서 수 십 년을 살았든간에 우리말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왠지 거부감이 든다. 왜 그럴까? 내가 영어를, 불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태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를 하는 중에 모르는 단어를 모국어로 쓸 수는 있다. 모국어로 대체하기 힘든 외국어를 번역하기 힘들어서 외국어 단어를 그대로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국어를 하는 중에 모국어에도 뻔히 있는 쉬운 단어를 외국어로 대체하는 건 그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태도를 은연 중에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번에 한국에 가서 우리말 반, 영어 반 섞인 웃기지도 않은 광고판을 어렵지 않게 봤는데 이건 언제 다시 한번 블로그에서 다뤄볼 만큼 할 얘기가 많다. 

한번은 프랑스에 온 지 고작 2년 되었는데 ‘우리 애기 공원에 프로므나드하러 가요’하는 엄마를 만났다. 외국인이 드물었던 그 동네에서 내가 우리애들한테 한국어를 하고 있었으니 너무나 반가와서 내게 말을 걸어왔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한국어를 하는 어떤 누구라도 반가왔을꺼다. XXX라는 이름의 나라는 인간은 그저 그에게는 허상에 불과한 거였다. 속을 다 터놓을 듯이 쉽게 친해졌던 그 엄마와의 관계는 결국 3개월도 가지 못했다. 쉽게 친해졌던만큼 헤어질 때도 전화 한 통으로 불발로 끝나더라. 어제 만난 엄마도 아직 말도 떼지 않은 아기에게 불어를 쓰고, 내가 일하는 프랑스 회사를 모른다. 프랑스에 살고 있고, 환경과 유기농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회사인데. 이 엄마와의 공감대를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엄마는 한국인 엄마를 같은 단지에서 만나서 너무나 반가와하는데,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감당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의 기대감에 못미칠 것 같아 만남의 첫단추가 불안하다. 

반대로, 가끔 내 불어를 완전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프랑스인들이 있는데, 그들 또한 언어 그 자체 밖에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다. 말하다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아니면 상대가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때, 그게 프랑스인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거고, 똑같은 경우가 외국인에게 닥치면 '프랑스를 제대로 모르는구나’라고 치부한다. 이건 편견이다. 또한 상대로부터 자기보다 못한 무언가를 찾아내서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스스로를 높이 추켜 세우려는 그릇된 자존심이다. 우리 모두 언어 저편에 있는 진실과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을 두고 차곡차곡 쌓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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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유기농에 대한 글을 우리말과 불어로 기고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자들을 도와 한불 번역작업도 합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연재 '전환을 향해서'), 녹색평론, 녹색전환연구소, 귀농통문, KBS Green, 지오리포트, 네이버 파워블로거(2008~2009). 기고, 통번역, 코디 등 연락을 원하시는 분은 방명록에 남겨주세요.

오늘은 평범한 환경주의자 친구를 소개할까 한다. 

필립 쿨롱, 그는 2016년 3월에 있었던 프랑스 지방선거에서 삭투루빌 지역구의 녹색당 남성 부후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우이 지역구의 녹색당 여성후보였던 나를 도와서 캬리에르쉭센느과 몽테쏭을 자전거로 돌며 같이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다. 

몽테쏭 시청 앞 공식 게시판에 첫 포스터를 붙이고 셀카를 찍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오더니 우리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 덕에 필립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보라, 물풀이 발라진 붓과 포스터 뭉치를 들고 순진하게 좋아하며 뿌듯해하는 우리를 ! (참고로, 우이 지역구와 삭투루빌 지역구는 각각 3개의 도시를 포괄한다. 우리 시청에서 몽테쏭 시청까지는 4.5km, 꺄리에르쉭센느 시청까지는 3km 걸린다.)


포스터를 붙이러 다닐 때면 늘 그가 풀을 쑤어 놓았고, 난 포스터를 들고 풀과 붓을 빌리러 그의 집에 갔다. 차 한 대가 들어갈 정도의 폭에 길이 20미터 정도인 막다른 길 끝에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형식적인 울타리도 정문도 없다. 나무 가지를 팔로 걷어내고 들어가면 그의 집 마당이 나온다. 왼편엔 작은 텃밭이 있고, 오른편엔 오래돼서 막혀버린 우물이 있고, 그 옆 나무 밑에 물풀이 놓여 있었다. 

혹여 그가 집에 있는 시간에 내가 들를라치면 그는 한 번도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텃밭에서 캔 뚱딴지 감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식물들, 한 양동이 가득한 퇴비 등 항상 땅이 그에게 내어준 것을 선뜻 내게 나눠주었다. 어느 날은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이었는데, 경주하듯 벽을 타고 올라가는 수십 마리의 달팽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 많은 달팽이 중 한 마리도 잡거나 죽이지 않았다.


내가 가장 높이 사는 필립의 장점은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종교인으로서나 환경주의자로서나 자신이 믿는 바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매우 드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필립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우이에 녹색당 모임을 처음 만든 일원이었다. 약간 수다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불평불만하고 타인을 비판하는, 말로만 환경주의자가 아니라 자기가 먼저 몸소 행동으로 보이는 환경주의자이다. 

환경을 위해서 고기를 아주 적게 먹고,  일회용 컵이나 포장, 비닐봉지를 쓰지 않으며,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동물의 권리나 환경문제에 예민했다. 절대 앞에 나서지 않고, 크든 작든 어떤 일이든 그가 필요하다 싶은 자리에서 아주 적절하게, 하지만 매우 큰 도움을 주곤 했다.

대형상가 건설 유혹에 시달리는 지역의 농토를 지키려고 그 밭에 감자를 심으며 연대투쟁 하기를 수년 째. 지난 10월에는 자연 생태계가 풍부한 프랑스 남서부에 정부가 공항건설을 강행하려고 해서 녹색당원들과 노트르담데렁드에 내려가 전국에서 모인 4만 명의 시민과 함께 대규모 반대집회에 참여했다. 노트르담데렁드는 우이에서 420km 떨어져있는데, 이 거리를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만에 왕복했다.  

그가 사회운동을 시작한 것은 1968년,  21살 때라고 한다. 그 당시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과 이보족 간의 전쟁이 있었는데, 무관심한 대중들에게 대학살을 알리려고 'A는 아우슈비츠의 A, B는 비아프라의 B' 등 일명 '공포의 알파벳' 전단을 뿌리고 다녔다. 

환경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진정한 교육자였고, 실천하는 종교인이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개인 지도를 통해 아이들을 가르쳤고, 자원봉사로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었다. 게다가 모든 이들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앙 같은 믿음으로 문맹률을 낮추려고 애쓰는 협회에서 활동했다. 

'학교에는 문제 있는 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 있는 교사가 있을 뿐'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합창 활동도 하고, 사회운동하는 가톨릭 단체인CCFD-테르 솔리데르 (Comité Catholique contre la Faim et pour le Développement-Terre Solidaire : 기아를 돕고, 연대의 땅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톨릭 위원회)에 가입해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등 제3세계 국가의 아픔을 나누고 그들을 돕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다. 

무엇보다 그는 늘 미소 짓고 다녔고, 사람들을 웃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나타났다. 필립 만큼 적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모임에 의견이 심하게 엇갈리고 위기가 닥쳤을 때, 한쪽 편을 들면서 공격적이 되거나 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우리 모두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 모두가 목표하는 바를 상기시키고 평화를 구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갈등이 생긴 상황 자체를 무척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워할 수가 없었고,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의 말대로 쉽게 갈등을 불식시키지는 않았지만.  

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탓일까. 성탄이 오기 정확히 2주 전 금요일, 고요한 밤에 그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늙어서 병들고 약해지면 주변에서 걱정도 하고 챙겨주기도 하는데, 이 친구는 그걸 다 마다하고 주변 사람 고생시키지 않고, 걱정시키지 않고, 많지 않은 예순아홉의 생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조용히 마감했다. 

온몸에 상처 하나 없이 자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갔으니 그 또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복이었으려니. 일요일 아침, 아마도 그는 구름 위에서 신과 낄낄거리고 캬리에르쉭센느에서 따온 싱싱한 양송이버섯을 나눠 먹으면서 신의 곁에 앉아 예배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자전거가 필요 없을 것이다. 순간 이동을 하든가, 날아다니면 될 테니까. 

필립 쿨롱 2015년 지역선거에서 삭투루빌 선거구 남성 부후보로 출마했던 필립의 공식 후보 사진.
▲ 필립 쿨롱 2015년 지역선거에서 삭투루빌 선거구 남성 부후보로 출마했던 필립의 공식 후보 사진.
ⓒ 정운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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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저녁 퇴근길에 핸드폰을 보니 지역신문 기자가 내게 전화한 흔적이 있었다. 다음 날, "필립 쿨롱 사망 - 환경주의자들은 상중"이라는 제목으로 필립의 부고가 지역신문에 실렸다. 지역선거 포스터용으로 내가 찍었던 바로 그 사진이 실렸다. 기분이 묘했다. 그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내 사진이 그의 부고 사진으로 쓰일 줄 전혀 몰랐는데.   

장례식 날짜까지 정확히 계산하고 숨을 거둔 건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 금요일, 다시 말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러 뿔뿔이 흩어지기 딱 일주일 전에 장례식이 열렸다. 아내도 자식도 없고, 금요일 이른 오후에 치르는 장례식이었음에도 난 프랑스에서 그렇게 많은 조문객이 모인 장례식은 처음 보았다. 

수백 명이 그 큰 성당을 빼곡하게 채웠다. 회교도 친구도, 교회/성당 다니지 않는 지인들도 모였으니 그 여느 일요일 미사 때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왔을 것이다. 프랑스는 한국 같지 않아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많은 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부조금이 오가지도 않는다. 필립의 장례식을 치뤘던 그의 누나는 조문객들에게 미리 안내를 했다. '화환은 가져오지 마세요. 필립이 지원했던 협회 활동에 지원금을 주시는 건 좋습니다'라고. 

장례미사가 끝나고 가기 전에 관 위에 성수를 뿌리거나 필립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길래 나는 관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때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주 평범한 환경주의자였고, 박애주의자였고, 평화주의자였던 친구의 삶이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는다.

필립이 수백 명의 조문객들 마음 속에 살아있다면 그가 혼자 했던 일을 앞으로 수백 명이 수백 배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평가할까? 이 세상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아니 우리 중에 예수가 있다면, 아마 필립과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걸 지금 알았으니 우리 중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본 들 그것이 과연 중요할까? 내가 우리 중에 낮은 곳에 임하는 예수가 되고 필립처럼 평범하나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게 오히려 보람되지 않을까? 원고를 넘기는 오늘, 우연찮게도 크리스마스구나. 


2016년 12월 26일 오마이뉴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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